즐겨찾기+  날짜 : 2020-07-13 오후 10:42:08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검색
속보
뉴스 > 자유기고

혜해선사(慧海禪師)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며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119@dkbsoft.com입력 : 2020년 06월 03일
↑↑ 이승표- 언론인
부처님 오실 날을 기다리셨던가.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최고 원로이신 보주당 혜해선사(慧海禪師)께서 세수100세를 다하시고 법랍 77세를 끝으로 지난 5월 29일 오후 9시 30분 조계종의 경주 ‘천경림흥륜사’에서 원적에 드셨다. 이날은 불기 2564년 윤사월 초 7일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초팔일을 하루 앞둔 날이어서 스님의 원적에 합장의 숙연함이 더해진다. 아마도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데다 이승의 불가에서 베풀고 쌓아 오신 공적 또한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24세 때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한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태어났다. 1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난 스님은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9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잃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동생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농가의 소녀 가장이 되고 말았다. 금강산에서 사명대사처럼 도통해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싶었다는 소녀의 큰 꿈은 도통 전 이미 이뤄졌다. 하지만 남동생을 비롯한 청년들이 징용으로 끌려가야 하는 두려움과 농민들이 힘들게 지은 농작물을 공출이란 이름으로 빼앗아 가는 왜놈들의 만행을 도력으로라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산으로 간 동기가 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처님이나 스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고 한 혜해스님은 남동생을 장가보낸 후 23세 때 홀연히 금강산으로 향했다. 낮에는 부엌일과 밭일, 빨래를 밤에는 천수경을 외우면서 1년 동안 절집에서 공양을 하면서 수행의 기초를 닦았다. 이어 금강산 유점사에서 참선수행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지만 그 기쁨은 잠시였다. 곧장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공산화된 북쪽에서는 더 이상의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스님은 1946년 10월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생명을 담보로 한 26세 젊은 여스님의 목숨 건 탈출이 아닐 수 없었다.
금강산에서 (손)경산스님으로부터 ‘무(無)자’ 화두를 받아 수행한 스님은 28세 때 첫 총림인 해인사의 효봉스님과 묘관음사 향곡스님을 비롯 이 나라 불교계의 최고승들의 문하에서 수행정진을 계속했다.
이후 스님은 1970년대 초부터 향곡스님이 주석(主席)하고 있던 이차돈 성사가 순교한 성지인 경주 흥륜사에 머물면서 성사의 뜻을 기리고자 선원인 천경림을 개원했다. 1980년대부터는 직접 죽비를 들고 선원장을 맡아 생을 다할 때까지 이곳을 수행정진의 요람으로 승화시켜 왔다.
특히 스님은 자신이 출가한 금강산 신계사의 복원불사를 위해서도 2004년부터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약 4년 동안 신계사에 머물렀다. 이때는 국민의 정부가 남북화해를 도모하면서 금강산 관광이 제법 잘 이뤄지고 있을 때였다. 당시 스님은 84세의 고령이었지만 이 절의 사라진 모습을 복원해 남북통일과 평화를 이루고자 염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無)자를 화두로 수행의 길에 나서 경지에 이른 혜해스님은 자신은 수좌들에게 화두를 ‘생명(生命)’으로 하고 “화두(생명)를 놓치면 죽은 줄 알아야한다”며 공부를 독려했다. 이를 보면 수좌들이 화두를 게을리 해서는 불법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일깨워 준 배경이 되게 한 지혜로 보인다.
생전 노스님은 아침 점심 저녁 예불을 빠트리지 않고 발우공양도 경내 수좌스님들과 늘 함께 했다. 하루 네 번 젊은 수좌들과 수행정진을 함께한 노스님이 큰방에서 정진하다가 저 멀리서 오는 발걸음만 듣고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취만 보고도 공양하는 것만 보아도 중생들은 번뇌가 사라지고 감동과 환희심에 젖는다고 했다. 수좌스님들의 말씀대로 그야말로 살아계신 생불(生佛)이셨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스님의 근검절약도 타의 추종을 불허케 했다고 전해진다. 장삼누더기를 깁고 또 깁어 더 깁을 곳이 없을 때까지 입었으며 더 입지 못할 때는 고양이의 이불로까지 쓰이게 했다고 한다. 또 실내 수세식 화장실도 물을 많이 쓴다는 이유를 들어 엄동설한 새벽에도 먼 곳의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했다고 하니 스님의 근검절약을 어느 누가 본받지 않겠나. 뿐만이 아니다. “우리들 먹는 것 입는 것 모두가 시주물이다. 농부들이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며 길쌈을 해서 만든 옷인데 어떻게 함부로 쓸 수 있는가. 시주님들 덕택으로 산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라”는 충고도 늘 잊지 않았다고 한다.
해외여행에서도 남들이 쓴 휴지가 아깝다며 모아 와서 재활용하고 일흔이 넘어서야 상좌들의 끊임없는 권유에 못 이겨 겨우 새 옷을 입었다고 한다. 스님의 근검절약은 해탈 이상의 도(?)를 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80여년 가까이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몸소 실천해 생불로 추앙을 받으면서도 “출가한 금강산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스님의 잦은 넋두리는 안타깝게도 이루지 못한 채 홀연히 떠나셨다. 생전 스님이 중생을 위해 베푸신 자비로운 공덕과 높은 도량을 부처님도 감당하지 못한 탓일까.
하지만 스님의 출가 화두인 무(無)자와 수좌들에게 사사하신 생명(生命)의 화두는 스님이 떠나신 뒤에도 스님을 추앙하던 중생들과 수행자들이 찾는 진리가 돼 영원할 것이다.
혜해선사의 영결식은 2일 경주 흥륜사에서 다비식으로 거행된다고 한다. 선사께서 이 땅에 심으신 자비로운 불기(佛氣)는 선사의 극락왕생을 축원 하는 많은 불자들의 마음속에 생불(生佛)의 사리로 남아 오래토록 간직될 것이다. 선사의 극락왕생을 축원 드린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119@dkbsoft.com입력 : 2020년 06월 03일
- Copyrights ⓒ경안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포토뉴스
오피니언
상호: 경안일보 / 사업자등록번호: 508-81-29913 /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 1436-5
발행인 : 강병주 / 편집인 : 반병목 / mail: ga7799@naver.com / Tel: 054-823-9200 / Fax : 054-822-7799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아00170 / 등록일 2011년 2월 9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선희
Copyrightⓒ경안일보.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