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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儒林)독립운동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上>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119@dkbsoft.com입력 : 2019년 11월 12일
↑↑ 김중위- 前 환경부장관, 4선의원
파리장서운동은 유림독립운동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을미의병으로부터 시작된 유림들의 독립자강운동은 3.1 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구체적이면서 국제화되기에 다다른 것을 본다.
3.1 독립선언서에 유림의 대표들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그들은 제각각 자신이 처해있는 자리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영남에서의 김창숙과 곽종석, 호서지방에서의 김복한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훗날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루어 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호남에서의 유림의 거두 전우의 유림독립운동의 참여거부는 다른 측면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찌 되었거나 유림독립운동의 한 복판에는 심산 김창숙이 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매천 황현이 “나라가 망하는데 어느 누구 배운 사람으로서 이를 서러워하며 죽는 사람 하나 없다면 그것이 말이나 되는 것이냐!” 하면서 자결했던 심정과 같은 심정으로 심산은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고 유림의 대표로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을사5적’을 참(斬)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부터 시작된 심산의 애국독립운동은 해방되는 날,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위정척사에 앞장섰던 유림들이 의병활동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는 운동이 세칭 파리장서운동이다.
필자는 이 파리장서운동이야 말로 제2의 3.1 운동이라고 평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3.1 운동의 불씨가 꺼져가려는 즈음에 전국의 유림들이 다시 한 번 불씨를 당겼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도 심산이 상해에 당도한 뒤에 세워졌는데, 우연은 아니라 할 것이다.
여하튼 심산의 일생을 보면 백절불굴의 정신 그 자체였고 애국지사 중의 애국지사였다.
유림(儒林)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대구형무소에서 14년의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는 과정에 그는 극심한 고문에 그만 앉은뱅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를 앉은뱅이 즉 벽옹이라고 지으면서도 자신을 한 번도 훼절하지 않았다.
일본의 강압에 자신의 뜻을 굽힌 많은 훼절자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분개하면서 재판과정에서는 변호사도 필요 없다고 거절한 분이었다.
일본 법률의 재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는 단 한 번도 간수(看守)들에게 목례 한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숱한 모욕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더욱 더 의연하게 그들을 꾸짖으면서 고매한 자신의 인격을 지켜 냈다.
그의 큰아들과 둘째아들도 독립운동에 잃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심산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과 만해 한용운 선생, 3분을 합해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3절(節)’로 추앙하자는 사람도 있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119@dkbsoft.com입력 : 2019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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